[소화기 질환 3부] 헬리코박터균의 두 얼굴 | '위암'의 원인인가, '공생'의 파트너인가
"당신 위에도 헬리코박터균이 살고 있습니다!"
20세기 말, 한 유산균 음료 광고는 대한민국을 '헬리코박터 파일로리(Helicobacter pylori)' 공포에 빠뜨렸다. 위궤양과 위암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 나선형 모양의 세균. 병원에서는 내시경 검사 후 "균이 있으니, 약 드시고 제균 치료를 하셔야 합니다"라고 당연하게 말한다.
하지만 여기, 우리가 한번쯤 던져봐야 할 질문이 있다.
인류와 수만 년을 함께 살아온 이 세균이, 과연 '절대악(絶對惡)'이기만 할까? 왜 똑같이 감염되어도, 어떤 사람은 위암에 걸리고, 어떤 사람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일까?
'헬리코박터 제균 치료'라는 현대 의학의 강력한 무기 뒤에 숨겨진 '빛'과 '그림자'를 통해, 이 오래된 동반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재정립해야 하는지 알아본다.
'헬리코박터균', 그는 누구인가?
- 정체: 인간의 위 점막에 기생하는 나선형 모양의 세균. 1982년 호주의 과학자 배리 마셜과 로빈 워런에 의해 발견되었으며, 이 발견으로 두 사람은 20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.
- 생존 전략: 위(胃)는 pH 1.5~3.5의 강력한 염산을 분비하는 '염산 탱크'다. 대부분의 세균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. 하지만 헬리코박터균은 **'유레이스(Urease)'**라는 효소를 분비하여, 위의 요소를 암모니아로 바꾼다. 이 알칼리성 암모니아가 위산을 중화시켜, 자신 주변에 '안전지대'를 만들고 살아남는 놀라운 생존 능력을 가졌다.
'그림자': 위 점막을 파괴하는 만성 염증 유발자
헬리코박터균이 위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이유는, 이들의 생존 전략이 우리 위 점막에 '만성적인 염증'을 유발하기 때문이다.
위염 → 위축성 위염 → 장상피화생 → 위암:
① 만성 위염: 헬리코박터균이 만들어내는 암모니아와 독소들은, 위 점막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만성적인 염증을 일으킨다.
② 위축성 위염: 염증이 수십 년간 지속되면, 위 점막이 얇고 위축되어, 위산과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샘들이 파괴된다.
③ 장상피화생(腸上皮化生): 위 점막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, 아예 '소장이나 대장의 점막'과 유사한 세포로 변해버리는 단계. 이것은 '위암의 전(前) 단계'로 여겨지는 매우 위험한 신호다.
④ 위암: 장상피화생이 진행된 점막에서, 세포 변이가 일어나 결국 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.
세계보건기구(WHO)의 경고: 이러한 명백한 연관성 때문에, WHO는 헬리코박터균을 **'1급 발암물질(Group 1 carcinogen)'**로 공식 지정했다.
'빛': 우리와 함께 진화해 온 오래된 친구?
하지만 최근, 일부 과학자들은 "헬리코박터균을 무조건 박멸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?"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.
- '알레르기'와 '자가면역질환' 예방 가능성:
흥미롭게도, 헬리코박터균 감염률이 높은 개발도상국에서는, 천식이나 알레르기 비염, 아토피, 염증성 장질환(크론병)과 같은 자가면역질환의 발병률이 현저히 낮게 나타난다. - 가설 ('오랜 친구 가설'):
인류와 수만 년을 함께 공생해 온 헬리코박터균이, 어린 시절 우리 면역 시스템을 '훈련'시키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. 이 '오랜 친구'가 사라진 너무나 깨끗한 환경에서 자란 현대인의 면역계는, 훈련 상대를 잃고 과민해져, 오히려 자기 자신이나 무해한 물질(꽃가루 등)을 공격하는 '자가면역질환'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놀라운 가설이다. - '역류성 식도염' 억제 가능성:
헬리코박터균은 위산 분비를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. 따라서, 헬리코박터균을 제균한 후에, 오히려 '역류성 식도염' 증상이 악화되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다.
'제균 치료', 꼭 해야 할까?
치료 방법: 2가지 이상의 항생제와 제산제를 1~2주간 함께 복용하는 강력한 '항생제 요법'.
치료의 딜레마:
-
- 장점: 제균에 성공할 경우, 위암 발병 위험을 30~50% 정도 낮출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.
- 단점: 강력한 항생제는, 헬리코박터균뿐만 아니라 우리 장 속에 사는 수십 조의 '유익균'까지 함께 몰살시켜, 장내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. (항생제 유발 설사, 장 누수 악화 등)
결론적으로, 헬리코박터균은 '위암'이라는 확실한 그림자를 가졌지만, '면역 조절'이라는 희미한 빛의 얼굴도 함께 가진, 야누스와도 같은 존재다.
| 따라서, 현재 의학계의 일반적인 권고는 다음과 같다: ① 위암 직계 가족력이 있거나, ② 위축성 위염이나 장상피화생과 같은 위암 전 단계 소견이 있거나, ③ 소화성 궤양을 앓고 있는 사람의 경우, → 위암 예방이라는 '이익'이, 장내 세균 파괴라는 '손실'보다 명백히 크므로, '적극적인 제균 치료'를 하는 것이 좋다. |
- 하지만, 위와 같은 위험 요인이 없는 건강한 사람이라면, 굳이 서둘러 제균 치료를 하기보다는, 정기적인 위내시경 검사를 통해 위 상태를 추적 관찰하며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현명할 수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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